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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에 밤이 드니 - 월산 대군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낙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빗만 싯고 븬 배 저어 오노라.

 



이 작품의 화자는 낚시로 고기를 잡는 데 집착하지 않고 탈속적인 공간에서 한가롭게 즐기는 무욕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유유자적하는 자연 친화적 삶을 통해 풍류 의식과 한정(閑情)을 드러낸 작품으로, 가을 강의 밤경치와 달빛 아래 낚시를 드리우는 정경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 월산대군

조선 전기 때의 종실. 추존왕 덕종(德宗)의 맏아들이며, 성종의 형으로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中善)의 사위이다. 이름은 정,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정에서 자랐다.

7세 때인 1460년(세조 6)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예종 즉위년) 동생인 잘산군(성종)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같은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되어 전지(田地) ∙ 노비 · 구사(丘史) 등을 하사받았다. 이러한 좌리공신에의 책봉은 그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왕위계승의 상실에서 나온 조처였다. 예종 사후에 왕세자인 제안대군(齊安大君) 현과 월산대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왕위에 즉위한 것은, 어떤 정치적 내막이 깔려있었다.

곧, 성종의 즉위는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시행한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최고 권신인 동시에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韓明澮)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성종의 즉위에 대한 종실의 반발을 막기 위하여 종실의 대표자격이고, 당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제거하고 권신들이 스스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취해진 조처의 하나가 좌리공신의 책봉이었다. 당시의 왕위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월산대군은 권신들의 농간에 의하여 좌리공신에 책봉되는 비운을 맞게 되자, 이로 인하여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만 하였다.

이후 그는 서호(西湖)의 경치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兩亭)을 개축하고, 망원정(望遠亭)이라 하여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적인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뒤 어머니인 덕종비 인수왕후(仁粹王后)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죽었는데 적자는 없고, 측실에서 난 두 아들이 있었다. 1473년 이후 덕종을 추존하고 이를 종묘에 부묘하기 이전에는 월산대군이 별묘를 세우고 봉사(奉祀)하여 덕종의 맏아들로서 행세할 수 있었다. 덕종이 종묘에 부묘되면서 그의 위치는 종실의 한 사람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종학(宗學)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한다. 그의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으며,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문 여러 편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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