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거냉 막걸리에 굵은소금 안주를 먹는다 [밥 먹다가 울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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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구석에 드럼통 두 개를 세워 시작한 가게가 50년을 버텼다. 번듯한 가게들은 노포라며 칭찬받지만, 이 집은 찾아가기 어려운 곳에서 반쯤 없는 듯 있다. 주인이나 손님이나 같이 늙어간다.
지방 도시의 한 낡은 시장 골목을 걸었다. 시장 골목은 그 고장 사람들이 쌓아놓은 세월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 말고는 거기 아무것도 없다. 대폿집과 실비집은 이제 천연기념물이 되어간다. 통계를 내보나마나 대폿집 주인이나 손님이나 같이 늙어간다. 그들의 평균 나이는 이제 일흔을 웃돌 것이다. 페인트로 쓰거나 셀로판지로 붙인 간판, 그것들은 내구성이 나빠 글자가 멋대로 일어나서 떨어져버린다. 멀리서 보면 ‘주ㅊ지’로 보인다. 가까이 가면, 빛 흐린 시장의 골목이지만 간신히 탈락한 음소들을 채워 넣어 읽을 수 있다. 떨어져 나간 자리에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주천집이다.
그렇게 나는 주천집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 딱 두 평 남짓 공간이 전부다. 탁자 하나, 간이 싱크대 하나. 탁자에 막걸리가 두 병. 주인이 오겠거니 하고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찾는다. 아니, 냉장고가 없다. 술집을 하지 않나 보다. 주섬주섬 일어나려는데 지긋한 아주머니가 들어선다.
“장사 안 하시나요. 나가려던….”
“앉어요. 마시게?”
“주천집은 무슨 뜻이에요?”
술이 샘솟는 집. 나는 그쯤 해석을 붙이고 있었다.
“주천이 동네 이름이지.”
그래도 나는 술 솟는 샘 집으로 삼고 싶었다.
“술이 없네요.”
“드세요. 잔 내줄게.”
탁자 위의 막걸리를? 이 미지근한 상온의? 제주에선 ‘노지 소주’라고 상온에 마시는 소주가 있다지만.
“옛날엔 다 상온에 마셨어요. 막걸리를 말통으로 받아쓰는데 땅에 파묻어 팔았지. 냉장고가 어딨어.”
소주가 차가운 냉장고에 들어간 건 빨라야 1980년대 초반, 서울 같은 대도시의 유행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1970년대에는 아버지가 다니시는 술집에 가면, 시렁 같은 선반에 노란 딱지의 ‘진로 소주’ 병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차가운 소주의 유행은 그 엉터리 맛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정이 좋지 않으니 맛이 고약했다. 요즘처럼 세련된 블렌딩(?) 기술도 없었으리라. 그래서 차갑게 해서 툭 털어 넣는 게 그나마 소주를 잘 마실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소주도 안 팔아. 손님이 전부 노인이야. 막걸리나 겨우 마시지. 나이가 팔십들이니까. 여기 미지근한 막걸리를 마셔요 다들. 배가 안 좋으니까 차가운 술은 못해. 안주도 우린 없어. 소금 집어 먹어. 막걸리는 밥인데 뭐. 안주가 필요하남.”
소금 안주에 인생 마지막 시기의 술을 마신다. 노인들이. 냉면집에는 노인들 메뉴가 있다. 거냉(去冷)이라고. 냉기를 제거하고 나오는 냉면이다. 차가운 게 버겁기도 하고, 거냉해서 미지근한 냉면이 맛을 더 잘 표현하기도 한다. 거냉 냉면 드시는 분들은 그래서 미식가라고도 한다. 미지근한 냉면이란 말은 성립하지 않겠지만.
“그러면 다 살게 돼”
“뭐 기초연금 나오는 날은 손님 많고, 아닌 날에는 적고. 안주는 어디서 사올게. 사다 드시던가. 두부를 부쳐달라고? 우린 그것도 이제 안 하는구만. 라면은 더러 끓이지만.”
가게 구석 진열장에 안성탕면 댓 봉지가 쓰러질 듯 놓여 있다. 아주머니는 전병을 사러 갔다. 오독오독한 무가 들어 있는 전병에 미지근한 막걸리를 마셨다. 이건 또 신세계네.
“아주머닌 강원도 사투리를 안 쓰시네요.”
“응. 나는 경기도 사람이야. 시집을 왔어요. 양은 파는 행상 아저씨가 중매를 했는데 와서 보니 화전민이야. 옥수수, 감자밖에 없더라고. 먹고살 길이 막막했어. 장까지 50리를 걸어가야 해. 내다 팔 게 뭐 있어. 옥수수 찧어서 내다 팔려면 시어머니가 뭐라 해. 장에 가서 비누도 사고 애기들 것도 사야 하는데 팔 게 없어.”
“아저씨는요?”
“어린 애기들 놔두고 돌아가셨어.”
“청상과부가 되셨구나. 아이고.”
미지근한 막걸리가 목을 타고 느리게 넘어간다. 차갑지 않으니 목넘김이 좋다. 옛날 농주가 그랬을까. 나도 거냉의 나이가 되는 것일까. 혼자 웃었다.
“어쩌다가 하여튼 야반도주를 했어. 애기들 들쳐 업고. 도시 가서 살자, 애기들 살리자, 그랬어. 어머니 모시고 그렇게 나왔어. 밤에 나오는데 엄청 추웠어. 바람이 산골에 들이치니까 설웁더라고. 펑펑 울면서 오는데 눈물이 뺨에 다 얼어붙어. 어머니가 말을 시키는데 눈물이 입술에 붙어서 얼어갖고 대답을 못했어.”
나는 막걸리를 거푸 마셨다.
“내가 그래서 벽돌을 졌어.”
“예? 곰방(공사장에서 벽돌과 자재를 져 나르는 일)을 하셨다고요? 이렇게 체구도 작으신데.”
아주머니, 아니 할머니하고도 한참 할머니인 그이는 작고 아담했다. 벽돌 곰방은 보통 일이 아니다. 옛날 어지간한 공사 현장에 승강기가 있을 리 만무. 합판으로 만든 지게에 벽돌을 차곡차곡 쟁여 지고 올라간다.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판자며 쇠로 만든 간이 계단을 타고. 그러다가 발을 헛디디면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다. 산재 통계에도 안 잡히는 사고가 났다. 그 시절, 건설 노동자가 무슨 통계에 들어갔겠는가. 산재라면 큰 기계 돌리는 사업장에서나 있는 일이었다. 건설 현장에서 추락하면 그냥 동네 사고였다.
“내가 마흔 장씩 졌어. 많이 져야 돈도 많아. 그걸로 애기들 먹이고 다 했지. 애들이 너무 고마워. 다 잘 자라서 한몫씩 해요. 먹고살아. 이 가게에서 애기들이 학교 다녔어. 요기 2층이 다락방이야. 아침에 밥 먹이고, 여기서 씻고 학교 갔지. 옛날엔 온갖 음식을 이 좁은 데서 다 했으니까 수도도 있고 그랬지.”
그 좁은 두 평짜리 가게, 2층 방에서 살림을 했다.
“이 동네 00병원. 00아파트, 00호텔도 내가 지었어. 15층까지 곰방이야. 벽돌 마흔 장. 완공날 받아놨다고 해서 마지막에는 밤새워서 벽돌을 날랐지.”
그이의 관절을, 허리를 무너뜨려서 지은 호텔이 지금은 폐업 위기다.
“옛날엔 제일 좋은 호텔이었는데 오래됐으니까. 내가 지었으니까 마음에 짠하지. 길 가다가 높은 건물이란 게 그냥 보이지 않아. 계단도 보이고, 비계(건물 외벽에 설치하는 임시 작업대)도 보여. 짓는 모양이 눈에 다 보이는 거지. 저 안에서 사람들이 벽돌 지고 날라서 미장하고 조적(벽돌 쌓기)해서 건물이 들어서는 거지. 사람들은 몰라. 우리가 뼈 빠지게 져다 날라야 건물이 돼.”
가게를 하나 시장통에 얻었다. 만원 주고 대폿집이라고 페인트로 써 붙이고 장사를 했다. 드럼통 두 개를 고쳐서 탁자로 놓았다. 음식 솜씨가 좋아 장사가 잘됐다. 그렇게 해서 벌써 50년이다. 어디 번듯한 가게들은 노포라고 칭찬받고 하는데 이 집은 찾아갈 수도 없는 시장 구석에 반쯤 없는 듯 있다.
“나는 밥을 안 먹어. 라면만 가끔 먹어. 그래도 이렇게 잘 살아 있잖아요. 라면만 먹어도 살아, 사람은. 벽돌 질 때도 뭐 먹고 지었나. 깡으로 지는 거지, 살자고 지는 거지. 그러면 다 살게 돼.”
낮술이 취한다. 걸어 나오는데 그이가 지었다는 늙은 관광호텔이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서 있다. 미지근한 시간이 또 이 지방 도시를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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