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등(石燈)은 불을 밝히는 돌로 만든 등구(燈具)로 석탑 및 부도와 함께 불교 석조문화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에 불교 전래 이래 금당 또는 석탑 앞에 석등을 배치해 부처에게 광명과 공양을 드리는 의미로써 가람(伽藍) 배치를 구성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여기에는 등화(燈火)를 장치할 수 있는 등감(燈龕)이 있어 붉을 밝힐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석등은 다른 석조건축과 마찬가지로 국내에 풍부한 화강석 재료에 힘입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등이란 명칭에 대해서는 현존 유물 이외에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 이래 석등이 건립되었고, 유물조사를 통해 사찰, 능묘, 궁궐이나 저택 등에 주로 세워졌던 것으로 조사됐다.
석등의 발생 연대에 대해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충청남도 부여 가탑리(佳塔里) 폐사지에서 백제의 석등 대석(臺石)이 발견된 바 있고,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에서 백제 석등의 옥개석, 화사석, 연화대석(蓮華臺石) 등의 부재가 조사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석등이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담양 개선사지 석등
담양 개선사지 석등
석등의 형식은 일반형과 고복형, 특수형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개선사지 석등은 이 중 고복(鼓腹)형식에 포함된다. 평면 팔각형 석등형식이 9세기부터 간주석 중간부를 풍선처럼 부풀리게 조성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유형의 석등은 종래 일반형 석등에서 나타나는 단순하고 소박한 양식에서 벗어나 좀 더 복잡하고 화사한 장식이 있는 것이 외견상 하나의 특징이다.
고복형 석등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팔각형 간주석 자체의 형태와 전체적으로 불안전한 조형 때문으로 판단된다. 상대 이상에서 주는 하중과 지상에서의 부력의 영향을 완충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담양 개선사지 석등
담양 개선사지 석등
담양 개선사지 석등
개선사지 석등은 기단부를 복원한 상태로 기단의 원형을 추정하기 곤란한 상태이다. 1965년 주변에 흩어져 있던 부재들을 정리하면서 시멘트로 사각형 지대를 구축하였고, 1991년 10월 해체 복원 당시 보고서를 통해 본래 기단부 모습을 일부 파악할 수 있다.
지대석은 현재 6매의 판석을 모나 마련된 상태로, 남측과 서측부에 연결된 판재 3매 만이 원 부재로 추정된다. 하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하단석과 상단석으로 구분되었다. 고복석은 상하 연화 복석 사이에 원구형의 석재를 끼워 넣어 간주석의 높이를 높인 상태이다. 상대석은 팔각으로 조성됐는데 하면은 연판 안에 보상화문(寶相華文)이 조식된 단엽 8판의 앙련이 조각되었고, 상면에는 별석으로 조성된 굽형 괴임대를 두어 화석을 받고 있다. 화사석 역시 팔각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면마다 사각형의 화창을 개설하였다. 화창(火窓)의 간지(間地)에는 모두 136자의 조성기가 음각되어 있다.
景文大王主
文懿皇后主大娘主願燈立
炷唐咸通九年戊子中春夕
繼月光前國子監卿沙干金
中庸送上油糧業租三百碩
僧靈▨ 建立石燈
龍紀三年辛亥十月 日僧入雲京租
一百碩烏乎比所里公書俊休二人
常買其分石保坪大業渚沓四結五畦東令行土北同土南池宅土
西川奧沓十結八畦東令行土西北同土南池宅土
土南池宅土
이 석등의 조성 기록은 咸通 9년(景文王 8년, 868)과 龍紀 3년(眞聖女王 5년, 891)의 2가지 기록이 함께 있다. 이 때문에 석등의 제작 시기를 밝히는데 혼선을 주고 있다. 명문의 내용은 국왕, 왕비, 공주의 발원으로 國子監卿 沙干 金中庸에 의해 上級油와 三百碩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僧 靈判에 의해 건립된 사실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또 建立石燈이란 구절이 있어 경문왕 8년 건립되었을 것이다. 龍紀 3년의 내용은 석등 건립 이후 사찰의 중수나 석등 수리 등의 내용을 추가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