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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씨앗은 없다

 

씨앗은 지금 이 순간을
지탱하는 조용한 기둥이다.
숲 바닥은 수많은 씨앗으로 가득하다.
발아한 씨앗, 새와 곤충의 먹이가 된 씨앗,
흙 속에서 부드럽게 분해되어 사라진 씨앗들은
결코 헛되지 않다. 새는 그 힘으로 날고, 곰팡이는
흙을 살리며, 땅은 유기물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살아남은 씨앗도, 자리를 내어
준 씨앗도 모두 숲을 이어 가는
힘이 된다.


- 남효창의 《우리는 모두 씨앗이다》 중에서 -


* 숲은 씨앗으로 가득하지만
그 어느 것도 헛된 씨앗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썩어 없어진 씨앗도 결국은 흙이 되어
또 다른 씨앗의 영양소가 됩니다. 씨앗이 발아해
숲을 이루듯, 사람 역시 씨앗입니다.
각자의 존재 이유와 역할로 모두가
숲을 이어가는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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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된 몸으로 출근하는 여자

 

흙이 된 몸으로 여자는 출근한다
베란다 난간에 목맨 화분은
꽃 필 거라 믿지 않으나
살닿았던 자리마다
월요일이 피어난다

여자가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을 지나면
온통 구멍 난 금요일이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금요일


- 김인옥의 시집 《힐엔드》에 실린
   시 〈일주일〉 중에서 -


*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일주일은 행성의 이름입니다.
하루하루는 이 이름 안에 갇혀 있지만,
각각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온통 흙이 된 몸으로 출근하는 여자도 있고,
거의 시체가 되어 퇴근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그 삶 안에 우리의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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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넋(魂)

 

넋(魂)은
사람에게만 있는 걸까.
매일 밤 감자 창고에서 살이 찢어지는
고문을 당하다 다음 날 아침 총소리와 함께
주검으로 변한 모습을 바라보는 성산은 넋이 없을까.
혼魂은 죽어야만 있는 걸까. 성산을 들렀다. 일제가
자기 몸에 뚫어 놓은 18개의 갱도 진지의 귀로
총구 앞에서 서 있는 생명의 소리를 들었고,
조선시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산의 정상에 만들어 놓은 성산봉수의
눈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  고수향의《이게 성산이다》중에서 -


* 굴곡진 역사의 현장을
성산이 어찌 보고 듣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육신은 스러져 흙이 되고, 혼은 흩어져 바람이 되고,
지수화풍(地水火風), 어느 것 하나 넋이 아닌 것이 있을까요?
그러기에 장소에 따라 알 수 없는 기운에 숙연해지기도 하고,
평안해지기도 하고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성산이 지켜보는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함께 숨 쉬는 현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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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쓸쓸하다고 한 것은
흙도 잠들기 때문이다. 솔직히
밭을 보아도 살아 있는 것은 무, 시금치, 파
정도이고 여름 같은 축제는 없다. 아침저녁으로
밭두둑에는 서릿발이 선다. 추운 아침에는 흰 얼음
기둥이 나타나며 무는 물론 파도 얼어 있다.
모두 잠들어 있다. 이런 밭에서는 흙을
먹는 나날은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한다.


- 미즈카미 쓰토무의 《흙을 먹는 나날》 중에서 -


* 겨울에는 흙도, 나무도,
씨앗도 잠듭니다. 동면의 시간을 거쳐야
봄에 힘차게 흙을 뚫고 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하루 일과에 지쳐 잠자리에 들고,
이튿날 아침 다시 기운을 얻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은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흙도 겨울엔 잠을 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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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은 이유가
움켜쥔 뿌리 때문만이 아니란 걸
알아버렸소

흔들리며 넘어가려던
그대의 뿌리를 부둥켜안고
숨도 쉬지 않고 깍지를 풀지 않았던 뜨거운 잇몸

세상에 수많은 나무들이
다시 늠름하게 푸른 아침
고요히 상처 난 뿌리에 입 맞추며
깍지를 푸는 흙이 있었소


- 고창영의 시〈비밀〉(전문)에서 -


*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은 본향입니다. 흙은 진실하고 정직합니다.
흙에 뿌리박으면 모든 것이 생명력을 얻습니다.
당신도 흙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이 흙입니다.
힐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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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물에 속해 있는 생물이다
흙에 속해 있는 생물이다

철쭉꽃에
투구벌레 애벌레에
호반새의 울음소리에
속해 있는 생물이다

그것을 우리는
언제부터 잊어버린 것일까


- 야마오 산세이의 《나는 숲으로 물러난다》 중에서 -


* 모든 생물처럼 인간도
물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습니다.
흙은 우리가 언젠가 돌아가야 할 본향입니다.
물과 흙이 오염되면 생존이 위험합니다.
철쭉꽃도 호반새도 위태로워집니다.
물과 흙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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