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새로운 창조는 대개 주어진 한계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활용한 흔적이 그 배경에 있다. 그 한계점이 곧 예술가의 시야가 넓어지는 순간임을 그는 경험한 것이다. 새로운 시선을 통해서는 나를 다시 보고, 새로운 시점을 통해서는 당신을 다시 보고, 새로운 시야를 통해서는 세상을 다시 본다. - 김소연의《시옷의 세계》중에서 - * 누구든, 무슨 일이든 반드시 한계점에 이르게 됩니다. 그 고비를 넘어서지 않으면 새로운 창조도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과연 한계인가?' 싶을 때 눈을 들어 그 너머를 바라보면 그곳에 새로운 나, 새로운 당신,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공간들, 그 경계의 영역들, 그 이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모호함을 시인은 상상력의 힘으로 정확하게 호명해낸다. - 김소연의《시옷의 세계》중에서 - * 시인은 상상력으로 '숨겨진 공간'을 찾아냅니다. 화가는 붓을 들어 그 '미지의 세계'를 그려냅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꿈으로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훌쩍 건너갑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는 세계'로 바뀝니다.
인도 속담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육체, 정신, 감정, 영혼이라는 네 개의 방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한 방에서만 산다. 하지만 일생을 풍요하게 살아가려면 날마다 네 개의 방에 규칙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지금 어느 방에 있는가? - 차동엽의《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중에서 - * 지금 내가 있는 방은 어디일까? 그 방이 내가 선택한 방이 맞는 것일까? 타인이, 혹은 사회가 떠밀어 넣은 방은 아닐까? 다른 무언가에 의해 그것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남을 원망하는 것을 아닐까? 또 나는 나를 얼마나 돌아보고 있을까? 혹 그 4개의 방문에 자물쇠를 달지는 않았을까? 내 자신에게 던지는 수많은 질문과 함께 나 자신을 깊이 되돌아봅니다.
가난하던 시절, 돈에 대한 개념이 없이 비싼 TV를 수백대씩 사들이던 그 때문에 나는 더 가난하게 예술을 해야 했지만, 그의 작품이 하나씩 탄생하는 것을 볼 때마다 너무 경이롭고 신기해 모든 아픔을 잊고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던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옆에서 간호하느라 작품 창작은 아예 손 놓고 있었지만, 그래서 남준이 이것 때문에 무척 미안해했지만 나는 후회나 미련이 없다. 백남준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내게는 '아트'였으므로. - 구보타 시게코의《나의 사랑, 백남준》중에서 - * 한 여자가 한 남자와의 지난 삶을 회고하면서 '예술'이었노라고 고백하는 것은 엄청납니다. 옹달샘에 오신 분들이 식사 후에 "음식이 예술이다"고 칭찬해 주시는 것도 엄청난 힘을 안겨 줍니다. 우리가 ..
저는 가끔 건물을 짓는 곳에 갑니다. 가 보면 그렇게 흉하고 먼지가 나고 냄새가 나고 복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깨끗이 마감을 하고 거기에 소파를 가져다 놓고 인테리어를 다 끝내면 우리가 쉴 수 있는 아름다운 집이 됩니다. 문제는 짓다가 그만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흉한 것이 짓다가 만 건물입니다. - 문성모의《하용조 목사 이야기》중에서 - * '짓다가 만 집'과 '짓고 있는 집'은 다릅니다. '짓다가 만 집'은 흉물처럼 보이지만 '짓고 있는 집'은 미완의 예술품입니다. 가우디의 건축물이 그렇듯 어떤 건물은 수십년, 수백년에 걸쳐 짓고 있고, 그 '짓고 있는 집'을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미래의 희망을 그려봅니다.
성격이 지나치게 볼록하거나 오목한 렌즈 같아서 삶의 현실적인 지평에서 적절한 초점거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천부적인 재능도 아무 소용이 없다. - 랄프 왈도 에머슨의《스스로 행복한 사람》중에서 - * 초점을 잘 맞추면 볼록렌즈 하나만으로도 불을 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볼록해도 초점을 잘 맞추면 됩니다. 자기 재능을 가꾸는 것, 꿈을 이루는 것, 이 또한 인생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가는 것입니다.